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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크리스마스의 기적’ 을 만든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 현봉학 선생


6·25 전쟁 당시 흥남 철수의 영웅, 분단을 넘는 평화를 이야기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유대인 1,100명을 구한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우리나라에도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피란민 10만여 명을 구출한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선생이다. 선생의 뜨거운 민족애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념으로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민간인 구출 작전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이룬 주역 현봉학 선생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이경훈 보라고등학교 역사교사

이경훈 역사교사는 보라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일 간 역사 갈등과 화해를 연구하면서 「쟁점 한일사」, 「마주 보는 한일사」(공저) 등을 출간했다. 동아시아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원교사,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수학한 흥남 출신 의사, 현봉학 선생

현봉학 선생은 1922년 함경남도 성진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이자 고등보통학교 교목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흥남으로 이주해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1941년 함흥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한 현봉학 선생은 서울에서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했고, 대학을 마친 후에는 평양 기독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지만, 해방의 기쁨은 곧 좌익과 우익의 이념 대립으로 변했다. 그사이 현봉학 선생은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와 제해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함흥에서도 소련군의 횡포와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온 가족이 월남하게 되었다. 월남 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인연으로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근무하던 선생은 1947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의 도움으로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버지니아 주립의과대학에서 2년간 유학할 수 있었다. 이후 1950년 3월 귀국해 모교인 세브란스의전에서 교편을 잡고 평범한 의사로 지냈다.
1992년 10월 경 현봉학 선생의 모습 1992년 10월 경 현봉학 선생의 모습
[출처: 현봉학 회고록 『나에게 은퇴는 없다』]
1973년까지 미국 해병대 기밀문서로 묶여 있었던 흥남철수작전 보고서 1973년까지 미국 해병대 기밀문서로 묶여 있었던 흥남 철수작전 보고서
[출처: ‘국제시장 실존 인물, 28세 청년이 보여준 용기’ 오마이뉴스 2021.1.17.]

통역관으로 한국전쟁의 중심에 서다

현봉학 선생이 군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바탕에는 의사로서의 직업윤리가 깃들어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친인척들과 피란을 하던 그는 수원에서 전투기 오폭으로 부상당한 민간인들을 보자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부상자들을 수원 도립병원으로 옮기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대전, 대구의 육군병원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의 미국 유학 사실을 알고 있던 지인들의 소개로 국군 해병대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피란민의 흥남 철수를 결정한 알몬드 장군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됐다.
유엔군 제10군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탈환하고 동북쪽으로 진격해 1950년 10월 함흥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알몬드 장군은 주둔 지역 근처에 있던 국군 해병대를 시찰했고, 그곳에서 통역을 담당하는 현봉학 선생을 만났다. 현봉학 선생이 유학했던 리치먼드에서 가까운 버지니아주 루레이가 고향이었던 알몬드 장군에게 그의 억양은 낯설지가 않았다. 현봉학 선생은 알몬드 장군과의 만남 직후 제10군단 사령부가 있는 함흥에서 통역관 및 민사부 담당 고문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10만여 명을 살린 ‘크리스마스의 기적’, 28세 청년의 용기

1950년 10월 중공군은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차로 참전한 26만 명의 중국 인민지원군은 4년여에 걸친 국공내전의 경험이 있는 군대였다. 이들은 참전 초기 수많은 인명 피해를 무릅쓴 이른바 ‘인해전술’을 구사하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서부전선으로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에서는 병력이 미처 후퇴하기도 전에 원산이 함락되면서 원산 이북에 남아 있던 유엔군과 국군이 고립되고 말았다. 그러나 함흥과 흥남 지역으로 밀고 들어오는 중국 인민지원군에 맞서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 방면에서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와 싸우며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처절하게 전투를 치른 끝에 흥남 철수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고립된 피란민들도 흥남으로 몰려들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에게 밀리자 1950년 11월부터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 지역의 모든 도시와 농촌 마을을 군사 목표로 한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다. 이때 북한군의 은신처가 될 만한 모든 목표물을 파괴하기 위한 소이탄과 네이팜탄이 지상에 불비처럼 쏟아졌다. 심지어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피란민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까지 살기 위해 남하를 선택했다. 동북부 지역 사람들이 유엔군과 국군이 있는 흥남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것이다.
매서운 바람이 불던 12월의 함경남도 흥남에 모여든 9만 8,000여 명의 피란민들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현봉학 선생은 알몬드 장군에게 피란민의 철수를 간청하게 되었다.
1만 4천명을 태우고 철수하는 매러디스 빅토리호 1만 4천명을 태우고 철수하는 매러디스 빅토리호
[출처: ‘내이름은 김치1호... 70년전 기적의 배에서 태어나다’ 오마이뉴스 2020.12.25.]
“장군,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국민들을 도와주세요. 우리가 그냥 떠나버리면 저기 있는 피란민들은
중공군의 공격에 몰살당하고 말 것입니다.
장군님, 도와주세요.
제발 우리 불쌍한 국민들을 살려주세요.”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 철수 장면에 나온 현봉학 선생의 대사 中)
알몬드 장군(좌)과 현봉학 선생의 청년 시절 모습
(출처: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때마침 맥아더 사령관의 민간인 철수 지원 명령서를 받은 알몬드 장군은 민간인 철수를 약속했고, 현봉학 선생에게 민간인 철수 업무를 맡겼다. 지프를 타고 함흥 시내로 달려간 선생은 시청과 도청에 가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람들에게 철수 소식을 알렸다. 애초 5,000여 명의 민간인 철수를 계획했던 유엔군은 항구에 몰려든 사람들의 절규를 듣고 최대한 많은 인원을 승선시키기로 했다. 12월 15일부터 흥남 부두에서 해상철수를 준비 중이던 미군 수송선과 화물선은 피란민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당시 피란민을 수송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정원 60명의 7,600톤급 화물선이었지만 현봉학 선생의 간곡한 부탁에 실려 있던 군수물자를 모두 버린 뒤, 피란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무려 1만 4,000명을 싣고 남하했다. 이후 12월 24일 아침까지 10만여 명에 가까운 피란민이 부산 등지로 내려왔고,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하선했다. 이 모든 일이 열흘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진행되었으니,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알몬드 장군은 훗날 “현봉학은 어쩌면 9만 8,000여 명의 사람을 구하라는 특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온 지도 모르겠다”라고 회고했다.

이산가족에 대한 회한 품고, 한민족 위한 의학 발전에 매진

2002년 국내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현봉학 선생은 흥남 철수에 관해 묻는 기자에게 ‘나는 죄인’이라며 자책했다.
“후퇴(철수) 과정에서 반공 활동을 했다거나 또 다른 이유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흥남 철수를 도운 것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00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이 되었어요.”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 부산에서 보건부 장관의 촉탁직으로 근무하던 현봉학 선생은 1953년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정착해 생활하던 그는 흥남 철수로 빚어진 남북 분단의 깊은 상처와 이산가족 때문이었는지 미국에서도 세계 각지에 있는 한민족 지원과 남북한 교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중 수교 이후 특히 임상병리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1987년부터 약 20년간 옌지(延吉)에 있는 옌볜(延邊) 의대를 왕래하면서 의학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이때 미·중한인우호협회를 조직하고 룽징(龍井) 명동촌에 있던 윤동주 생가를 정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또 임상병리 연구로 1992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임상병리학회(ASCP) 주관 세계적 권위인 ‘이스라엘 데이비슨상’을 수상, 1993년에는 국제고려학회를 창설해 남북한 의학자를 포함한 전 세계 한인 의학자를 모아 ‘한민족의학학술대회’를 개최해 의학을 통한 한민족 화합의 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꾼 역사, 그를 기리다.

2016년 12월 19일, 서울 남대문에 있는 세브란스 빌딩 광장에서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곳은 과거 현봉학 선생이 다니던 세브란스의전이 있던 자리다. 이날 제막식에는 현봉학 선생의 딸 에스더 현과 헬렌 현 씨는 물론, 흥남 철수 당시 미 제10군단 사령관 알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 씨도 참석했다. 특히 제막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당시 더불어민주당 고문)은 축사를 통해 “부모님이 그날 흥남 부두 철수선에 오르지 못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현봉학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과 어린 누나가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했고, 문 대통령은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지 3년 뒤 태어났다고 한다. 한편 제막식에는 흥남 철수 당시 이틀 간 매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5명 중 2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현봉학 선생은 생전에 왜 스스로 ‘자유 대한을 찾아온 10만 가까운 피란민의 영웅’이 아니라 ‘이산가족 100만을 만든 죄인’이라고 생각했을까? 흥남 철수는 이념 대결의 전쟁 속 냉전과 반공의 신화이자 자유 진영과 체제 우월의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흥남 철수의 주역을 현봉학 선생이 아닌 당시 국군 1군 단장 김백일로 둔갑 시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과오를 가리는 사례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념과는 상관없이 이산가족이 된 100만 명의 고통은 오롯이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비극이 되었다. 현봉학 선생이 얘기한 ‘죄인’이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혹한기에 가족을 동반하고, 만삭의 임산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해야만 했던 개인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참혹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춥고, 굶주리고, 두려웠던 그 해 겨울, 국민 10만여 명이 군수 물자 대신 외국 군함 위에 숨죽여 탈출했던 기적과도 같은 역사의 한 가운데 국가적 사명을 품은 20대 청년, 현봉학이 있었다. 이산가족의 이별을 아파했던 그의 사명과 책임감은 어디까지였을까. 분명한 것은 그가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도 이어져온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처럼” 케이 로고 이미지
서울역에 위치한
현봉학 선생의 동상
[출처: 국가보훈처 온라인기자단 ‘흥남철수작전의 영웅, 현봉학 선생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