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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3 Vol.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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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좋은 사람 좋은 생각

단 하루를 살아도 후회 없이 살고 싶다. 누구든 한 번쯤 해보는 생각이지만, 삶의 관성을 뒤집기란 쉽지 않다. 젊으면 젊은 대로 ‘성공해야 한다’는 세속적 목표에 얽매이고, 나이 들면 든대로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생각의 한계에 발목이 잡힌다. 정태섭 교수 역시 의사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엑스레이 아티스트’라는 새로운 인생 경로를 향해 과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정라희 / 사진 김수

한 번뿐인 인생, 나대로 살고 싶다는 꿈처럼 살다

인생은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 ‘후회 없이 살았노라’ 말하는 이는 드물다. 정태섭 교수도 한때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았다. 의과대학에 다닐 때는 의사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했고, 의사가 된 후에도 교수로 자리 잡고자 병원과 연구실을 오가며 바쁘게 지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의사로서 인정받고 현재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소소한 일상에서 오는 행복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맡은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병원 생활은 변함없이 분주한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좀 더 좋아하는 일을 고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갔다. “어린 시절에는 호기심 대장이었어요. 미술 교사인 아버지께서 그 시절에는 드물게 창의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다빈치식 교육을 하셨습니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종종 엉뚱한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이런저런 발명품을 만들기도 했고요.”
생각이 달라지니 생활도 달라졌다. 예전과 똑같이 병원에서 일과를 보내도, 일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즐기던 취미 생활도 다시 시작했고, 병원에서 머리 쓰는 일로 지칠때면 소소한 발명품을 만들며 머리를 식혔다. 한창 뛰어놀 나이에 어쩔 수 없이 병실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병원 옥상을 작은 천문대로 만들기도 했다. 그는 동네와 병원을 오가는 아이들과 함께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이 행사를 10년간 이어갔다. 아이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좀 더 알리고 싶어 어린이 과학 프로그램을 2년간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린 시절 당시의 호기심을 소환하니 하루하루가 즐거워졌다.
영동세브란스병원 근무시절 열었던 어린이 밤하늘 별 관측행사
“나이와 직업을 잊으면 사는 게 재밌어집니다. 제 취미는 스무 가지가 넘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어떻게 그 취미를 다하고 사느냐’며 신기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세계 화폐 수집이나 별자리 관측, 소라 껍데기 스피커나 진공관 앰프 만들기처럼 일상에서 소소하게 할 수 있는 취미를 꾸준히 하고 즐길 뿐입니다. 그런 취미들이 실제 삶에 새로운 기회를 전해 주기도 하고요.”

엑스레이에서 발견한 예술의 세계

엑스레이 아트 역시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색다른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전공인 영상의학은 신체 부위를 찍은 사진 혹은 영상을 판독해 치료에 이용하는 분야다. 내과처럼 환자를 직접 만나 진료하는 임상 의사와 달리 엑스레이나 CT(컴퓨터단층촬영), MRI(자기공명영상) 등을 통해 얻은 영상 자료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다.
“예전에는 환자들이 영상의학과를 ‘엑스레이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판독실에 앉아서 영상 자료를 보고 있으면 이따금 독특한 형상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트’ 모양 같은 것이지요. 그런 걸 발견하면 의학자로서 마음은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몸속 어딘가에 따스한 마음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상력 덕분일까. 그를 엑스레이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게 한 첫 작품도 운명처럼 떠올랐다. 때는 2006년 가을밤, TV를 보다가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를 접하고 문득 그 장면을 엑스레이로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꿈꾸는 카라 (Dreaming Calla)
입 속의 검은 잎 (Black leaf in the mouth) 장미의 영혼 (Soul of rose)
“장롱 서랍에서 장미 꽃잎 모양의 브로치를 찾아 입에 넣고 엑스레이로 찍으면 ‘입 속의 검은 잎’이 되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데 제가 직접 브로치를 물고 사진을 찍으니 예전에 치아 치료를 받은 흔적이 눈에 띄더라고요. 치아 건강에 자신있는 후배가 모델로 선뜻 나서줘 제 첫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엑스레이로 표현한 ‘입 속의 검은 잎’을 온라인에 공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반응이 터졌고, 미디어에서 인터뷰 요청도 여러 차례 들어왔다. 그러다 누군가 지나가듯 “전시회는 언제 하느냐”라고 물었고, 엉겁결에 ‘6개월 뒤 첫 전시회’라는 타이틀로 신문 기사가 났다. 이미 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부지런히 작품을 모아 인사동 갤러리를 찾아다녔다. 당시 그의 나이는 쉰셋.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은퇴를 준비할 나이에 가까웠지만, 그는 사회 초년생의 심정으로 포트폴리오를 들고 갤러리의 문을 두드렸다. 열두번의 거절 끝에 겨우 찾은 갤러리에서 비로소 ‘단체전을 열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고, 그렇게 엑스레이 아티스트로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나이 드는 일에도 좋은 점이 있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지금, 정태섭 교수는 여러 차례 개인전과 작품전을 열었고 국제 아트페어에 초청되는 엑스레이 아티스트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을 뿐 아니라 사진학과 전공 교재에도 소개되었다. 50대이던 그때, 여러 갤러리의 반복되는 거절에 ‘그래, 이 나이에 무슨…’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면 ‘엑스레이 아티스트 정태섭’은 없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저는 예술계에서는 ‘늦깎이’였습니다. 많은 분이 나이가 들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두려움을 느낍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몸담아 온 분야에서 쌓아온 경력이나 명성이 있으니 내심 ‘이만큼 대우받아야 한다’는 기준도 높고요. 행여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이제껏 쌓아온 이력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주저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늦깎이로 시작하는 게 좋은 점도 많습니다. 저 역시 영상의학을 통해 축적해 온 영상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었기에 엑스레이 아트를 할 수 있었거든요.”
정태섭 교수는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더 있다”라고 말한다. 세월의 파고를 지나면서 작은 실패나 거절에 연연하지 않는 법을 알고, 나아가 조금은 뻔뻔하게 다음 시도를 이어갈 수 있는 까닭이다.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싶어 찾아간 갤러리에서 거절당할때 나중에는 ‘거절하는 이유라도 알자’ 싶어 그때마다 피드백을 받아 메모로 정리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속에 작가로 향하는 비결이 숨어 있었어요.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얼굴 두께가 1밀리미터씩 두꺼워진다고 생각하고 저자신에게 주문을 걸었습니다. 눈앞의 실패에 연연했다면 저의 인생 2막은 열리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준비된 답이 아닌 과정을 통해 얻는 깨달음

2019년 8월에 반평생 몸담아 온 연세대학교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한 정태섭 교수는 2019년 9월부터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병원장 김현수 신부) 영상의학과로 자리를 옮겨 변함없이 의사와 엑스레이 아티스트라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국제성모병원에 작품을 기증해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작은 전시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지난 4월에도 광화문에서 약 한 달 동안 개인전을 열었다. ‘더 늦기 전에(Before it’s too late)’라는 전시회 제목은 두 사람이 춤추는 모습을 담은 신작에서 따왔다.
더 늦기 전에 (Before it's too late)
병원에서 자료 화면으로 볼 때는 흑백 영상으로만 보이던 엑스레이도, 화사한 꽃이나 역동적인 사람의 자세와 만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예술의 매개체가 된다. 엑스레이로 촬영할 수 있는 크기와 구역은 한정적인 까닭에 대형 작품은 수십 번을 나눠 찍고 후반 작업으로 이어 붙여야 한다. 한 작품을 만들 때는 짧게는 10시간, 길게는 몇 날 며칠이 걸리지만 병원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개인 시간을 쪼개 작업하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시간의 흐름을 잊을만큼 몰입감을 느낀다.
얼핏 보면 성공한 의사의 외유처럼 보이지만, 지금까지 그의 선택은 세속적 판단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기준이 있었다. 그렇기에 전공을 택할 때도 당시 한국에서는 낯설었던 영상의학과를 선택해 ‘국내 영상의학과 전문의 면허 1번’이 되었고, 그 사이 의학계에서 영상의학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졌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하는 요즘, 그는 오히려 ‘답이 보이는 길’만을 택하는 세태를 아쉬워한다.
“의과대학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답을 먼저 가르쳐주기보다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과정을 겪어보기를 권유합니다. 하지만 결과를 빨리 얻는 공부를 해온 학생들은 그 과정에서 쉽게 포기할 때가 많아요.”
그는 말한다. 스스로 답을 찾을 때는 열 가지 질문 중 하나의 답을 얻기가 쉽지 않지만, 그 하나의 답을 깨달았을 때 오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해도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면 남은 인생이 즐거울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도 온전한 자기 삶을 살아가고자 ‘별난 의사’를 자처한다. 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