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 매거진(더케이매거진) Magazine
Monthly Magazine
February 2023 Vol.66
생각 나누기 아이콘 이미지

생각 나누기

좋은 사람 좋은 생각

문화는 국력이다. 지난 2021년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 수출액은 124억 5,000만 달러(14조 3,000억 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가전 수출액 86억 7,000만 달러, 전기차 69억 9,000만 달러, 디스플레이 패널(36억 달러)보다 높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대한민국은 문화 강국이었다.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세계 최고(最古)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보유한 나라 대한민국. 그리고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은 국민의 힘으로 문화의 힘을, 나아가 대한민국의 힘을 지켜내고 있다.

이성미 / 사진 김수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서(高書)들. 
                                왼쪽부터 자치통감강목, 국조보감, 계원필경집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서(古書)들. 왼쪽부터 자치통감강목, 국조보감, 계원필경집

60년 오직 한 길, 책으로 걸어온 길

2020년 삼성출판박물관은 개관 30주년을 맞아 특별전 ‘책으로 걸어온 길’을 열었다. 책으로 걸어온 길. 삼성출판 박물관을 세운 주역이자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문화 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인 김종규 이사장의 삶을 응축해 놓은 말일지도 모른다.
김종규 이사장은 어릴 적부터 책 속에서 살았다. 여덟 살 터울 형인 김봉규 삼성출판사 창업주가 서점을 운영한 덕분이었다. 김봉규 창업주는 1951년 대양서점으로 시작해 1964년 삼성출판사를 세웠다. 이후 형을 도와 출판사에서 일하며 김종규 이사장도 새 책과 헌책 속에서 파묻혀 지냈다.
“1964년 삼성출판사 부산지사장을 맡으면서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부산에는 6·25 전쟁 이후 형성된 책방골목이 있어요. 피란 온 사람들이 생계가 어려우니 가보를 많이 내다 팔았는데, 그중 귀한 책도 책방에 모였지요. 덕분에 저도 희귀본, 고서 등 좋은 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책 사랑이 남다른 김종규 이사장에게 귀한 책이 끌리지 않을 리 없었다. 안목 높은 그의 손에 귀한 서적이 들어온 것도 천운이었다. 한 권 두 권 사던 것을 모아놓으니 ‘역사’가 되었다. 1990년 김종규 이사장은 그동안 모은 고서, 활자를 토대로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출판 전문 박물관, 삼성출판박물관을 세웠다.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한 고(故) 이어령 교수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2000년대까지 박물관 1,000개는 돼야 하고, 출판박물관은 필수” 라고 말한 것도 동력이 되었다. 출판박물관을 두고 김종규 이사장은 “전 생애를 바쳐 정진한 출판인의 마지막 사명이라는 간절한 발원이 오늘을 있게 한 것”이라고 했고, 이어령 교수는 “박물관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어떻게 연약한 종이와 퇴색하기 쉬운 역사의 문자들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며 그 의미와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삼성출판박물관은 시대별 출판 인쇄물과 고활자, 인쇄 기구, 관계 유물 수만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국보 제265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과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 권22, 보물 제758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 중요 문화재도 있다. 이 밖에도 박물관에서는 상설 전시와 인물도서전, 저자 서명본전 등 기획 전시를 매년 진행함으로써 우리 출판문화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문화유산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문화유산이 한 나라의 품격을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공동체 정신으로 지키는 우리 문화유산

‘문화는 곧 국가의 품격’이라는 김종규 이사장의 생각은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꽃피우고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국민이 기부 또는 증여, 위탁한 재산과 회비 등을 활용해 보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과 자연환경 자산을 취득한 후 이를 보전하고 관리하는 특수법인이다. 2007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재임 시절 출범(초대 이사장 유영구)했다.
동숭동 감로암에서 중광 스님(왼쪽부터)과 당시 삼성출판사 사장이었던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 구상 시인, 법모(法母)이자
암자 주지인 혜련스님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 [사진제공: 삼성출판박물관]
유족의 기증을 통해 구성된 「오발탄」을 쓰신 ‘학촌 이범선’의 서실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은 국가가 국보, 보물, 지방 문화재 등으로 지정해 보호·관리합니다. 그러나 꼭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데도 국가의 관리를 받지 못하고 있거나 후손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훼손 위험에 놓인 문화유산도 많습니다. 그런 문화유산을 지켜내는 일을 국민이 하고 있습니다.”
‘국민(國民)이 믿(信)고 맡긴다(託)’는 뜻의 ‘국민신탁’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훼손된 문화유산을 지키자”라며 시민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간 운동 ‘내셔널 트러스트(The National Trust)’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문화유산국민 신탁은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2007. 3. 25. 시행)’을 설립 근거로 하며, 그 안에 한국의 공동체 문화와 십시일반(十匙一飯) 정신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공신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예로부터 마을 공동 재산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지키고 관리했던 것 처럼, 우리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현세대가 힘을 모아 함께 지키고 관리한다는 점에서 가장 한국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문화유산국민신탁 정기회원 후원금은 1만 원을 넘지 않습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대신 오래도록 꾸준히 후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밥 한 숟가락씩 모아 한 사람의 끼니를 채우듯,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모아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나간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김종규 이사장은 우리 문화유산 중 공간의 가치를 높이 산다. 우리는 태어난 시기를 결정지을 수는 없지만, 살아갈 공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공간을 만들어내려 한다. 고려 중기부석사무량수전을 지어낸 안목과 예술성을 지금의 우리가 따라갈 수 없듯, 공간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안목과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며, 그 시대 사람들이 전하고픈 이야기의 둥지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그동안 2009년 시인 이상의 옛집 터 매입, 2010년 신라문화현창(顯彰)에 일생을 바친 윤경렬 옛집 매입, 2012년 소설「태백산맥」의 배경인 보성여관을 개관 등을 진행해왔다. 특히 이상의 집은 이상이 1911년부터 1934년까지 산 곳으로, 경제개발로 훼손 위기에 처해 있다가 문화유산국민신탁의 손을 거쳐 2018년 문화 공간으로 재개관할 수 있었다.
문화재를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는 일에도 김종규 이사장은 힘을 쏟는다. 지난해 4월 김종규 이사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돈암서원에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가례집람」 등 54점을 기증했다. 「가례집람」은 사계 김장생 선생이 주자(朱子)의 「가례」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가진 것을 선뜻 내어주지만 생색은 내지 않는다. 시인신물념 수시신물망(施人愼勿念 受施愼勿忘). ‘누구에게 베푼 것은 결코 생각하지 말며, 받은 것은 결코 잊지 말라’라는 좌우명을 그는 발자국마다 새기고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사무실이 있는 덕수궁 중명전 앞에 선 김종규 이사장
[사진제공: 삼성출판박물관]

생애 30년은 배우고, 30년은 일하고, 30년은 봉사하며 삽니다

‘문화계 마당발’, ‘문화계 대부’라는 수식어답게 김종규 이사장은 매일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를 만나고,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주례를 부탁하러 오는 예비부부에게도 문화유산국민신탁 후원이라는 조건을 내건다. ‘친절한 강요’에 의한 ‘애국’이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건넨 덕분에 회원 수는 1만 5천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문화 지킴이 십만 양병’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인생을 90세까지로 볼 때 첫 30년은 배움으로 채우고, 다음 30년은 생업에 전력을 쏟으며, 그 이후 30년은 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 이것이 내 인생 모토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생을 봉사하며 살기로 했으니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킬 겁니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도 계속하고요. 아마 나이가 들어 병원 신세를 지더라도 문병하러 오는 사람에게 ‘문화유산국민신탁에 후원하고 있느냐?’ 하고 물을 겁니다.”
“우리 문화를 지키는 일을 함께하고 있는가?” 김종규 이사장의 물음은 어린아이도 피해 갈 수 없다. 아직 걸음마조차 떼지 못한 아이도 문화유산국민신탁의 ‘국민’이 된다. 문화유산에 대한 교육 또한 어릴 때 시작할수록 좋다. 김종규 이사장은 학교에서 문화유산에 대해 바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보물찾기처럼 가까이 있는 문화유산을 찾으면서 말이다.
“학교 안의 고목(古木), 동상도 문화유산입니다. 하지만 수 년간 학교에 다니면서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졸업하는 학생이 많아요. 우리 학생들에게 학교에 있는 문화유산부터 만나게 해주는 건 어떨까요? 그다음은 우리 마을의 문화유산과 자연환경, 그다음은 도시의 문화유산으로 점점 시야를 넓혀주십시오. 저는 최고의 교육 방법은 지적 호기심과 풍부한 상상력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교육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선생님들께서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십시오. 재미있게 가르쳐주세요. 하나 더 바라자면, 우리 교직원 여러분도 문화유산국민신 탁의 일원이 되어 문화를 지키는 일에 동참해 주십시오.”
문화유산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다. 손주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조부모처럼, 문화유산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전한다. 문화유산을 통한 지혜의 대물림이 끊기지 않도록 돕는 일,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은 앞으로도 그 일을 해낼 것이다. 국민의 합심과 자신의 진심으로 말이다.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