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 매거진(더케이매거진)

생각의 뿌리 > 역사 한 스푼  
교육·의학계 등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한 이들의 발자취

역사 한 스푼

국문학 연구의 위대한 스승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난초(蘭草)의 일부-

가람 이병기 선생의 대표적 시조 작품 ‘난초’의 네 번째 편입니다. ‘난초’는 연시조로 전체 네 편 일곱 수로 이루어졌는데, 이 네 번째 편은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시조를 배우며 가람의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그를 시조 작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연구 분야는 어학·문학·민속학·서지학 등 국학 연구 전반을 넘나들 정도로 넓고도 깊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가람이 이룬 괄목할 만한 성과는 그가 남긴 시조집 두 권, 시조론 한 권, 국문학사 한 권, 국문학개론 한 권, 주해서 여덟 권, 번역 및 선집 여섯 권, 교과서 열한 권, 서지 목록 두 권, 어린이 역사서 한 권, 육필일기와 고어(古語)의 한자 훈과 풀이를 쓴 고어집 한 권을 비롯해 신문과 잡지 및 학술지에 실린 850여 편의 저술과 교가 47편 등 총 930여 편의 저술 자료에 담겨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어람용 의궤
어람용 의궤
국난 속에서 피운 애국심과 한글 사랑

가람 이병기 선생은 189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집안에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쳤습니다. 15세가 되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국의 국권이 침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데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지만, 그는 국민을 계몽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교사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성사범학교에 진학한 가람은 휴일이면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설립한 조선어강습원에서 조선어 문법을 공부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성사범학교 일본인 교원에게 몇 차례나 시말서를 써 내야 했지만, 가람은 오히려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끝내 고등과를 마쳤습니다. 그에게는 사범학교보다 조선어강습원에서 배운 것이 더욱 소중했습니다. 쉽게 배울 수 없는 우리 말과 글을 깊이 있게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19세 때인 1909년 4월부터 1966년 6월까지 57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썼습니다. 덕분에 그의 일기는 격동의 세월을 거친 우리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훌륭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처음 일기는 한문으로 썼지만 1914년 8월부터는 한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글 보급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한성사범학교 졸업 후 전주와 여산 등지에서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가람은 1919년 3·1운동 이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이후 1921년 그는 권덕규, 임경재, 최두선 등과 조선어문연구회를 조직하고, 1922년부터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이때부터 조선어학회 간사를 맡아 한글강습회와 한글 사전인 ‘말모이’ 편찬 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

시조연구에 바친 일생

가람은 당시 한글강습회를 통해 시조 작품 속 고유 표현을 살려 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32년에는 평론 ‘시조는 혁신하자’를 발표하며 ‘시조혁신론’을 주장했습니다. 시조혁신론은 시조가 근대문학으로 이행하는 데 실패한 원인을 찾아 어떻게 이를 살릴 것인지를 실증적으로 연구해 도출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리듬이 시조의 형식에 어떻게 적용되고 나타나는지를 연구했고, 특히 여성이 쓴 시조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기녀의 작품은 관념이나 유희로써 시조를 읊은 것이 아니라 절박한 생활 속에서 그들의 생활 감정과 인정(人情)을 교묘한 수사로 읊어내어 귀족 양반들의 문학을 압도한다”라고 자신의 저서 『국문학전사』에 쓰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황진이의 시조에 대해서는 “자신의 실감에서 비롯된 시조야말로 그 시대 모든 노래 가운데서도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1938년부터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항일운동 요주의 단체’로 규정해 감시했고, 결국 가람을 비롯한 회원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가람은 함흥형무소 등지에서 복역하다 1943년 9월 기소유예로 출소했습니다.

어람용 의궤
▲ 이병기 선생의 한성사범학교 재학시절
(아랫줄에서 맨 오른쪽이 이병기 선생)
어람용 의궤
▲ 이병기 선생의 한성사범학교 재학시절(아랫줄에서 맨 오른쪽이 이병기 선생)
직지심체요절
▲ 이병기 선생의 청년 시절

직지심체요절
▲ 이병기 선생의 청년 시절
고문헌 수집이 빛을 발하다

한일병탄 후 가람은 고전적 가치가 높은 고문헌을 찾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망하자 고문헌은 ‘쓸모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버려지기 일쑤였습니다. 교사였던 그는 월급의 절반 이상을 고문헌 수집에 쓰기도 했는데, 가람이 소장한 고문헌 중에는 『한중록』,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의유당일기』, 『요로원야화기』, 『가루지기타령』 등 문화재급 귀중본도 많았습니다. 그는 궁핍한 살림살이에도 돈이 생길 때마다 고문헌을 찾아 모았고,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풍부한 고전문학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람은 고서 ‘수집’에 그치지 않고 고서를 활용해 496권에 달하는 고문헌에 대한 해제를 쓴 책을 집필·발간했습니다. 그의 저서와 고문헌은 해방 후 한국문학사를 구축하는 훌륭한 기초 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가람은 생전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5,000여 권의 자료를 기증했고, 그 자료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해방 후 가람은 서울대학교, 전북대학교 등 50여 개 학교의 교가를 작사했습니다. 1949년에 쓴 일기에는 “10월 26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교가 발표식에서 교가를 읽으며 해설했고, 뒤이어 현제명 씨가 작곡에 관해 설명했는데 퍽 유쾌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 시조 작품을 실은 단행본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 서울대 교가(이병기 선생 작사)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 가람문학관(전북 익산)

시조 부흥을 이끌어낸 가람

시조는 고려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읊어왔던 전통 시가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주로 벼슬을 했던 선비, 즉 사대부들이 지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도 향유한 전통 문학의 한갈래입니다. 다른 전통 시가 형식은 시대에 따라 유행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지만, 시조만은 700여 년 역사를 이어오며 지금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정형시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시조가 이렇게 세월의 벽을 넘어 현대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우리 문학의 시련기에도 우리말의 연구와 보급 운동, 새로운 감각의 시조 창작을 꾸준히 이어온 가람 이병기 선생 같은 분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시조 작가로서 그의 위상이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이유입니다.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