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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 즐기는 이들의 이야기

생생지락(生生之樂)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한다

허원미디어 유은실 대표
차별의 벽 허무는 반편견 교육
차별의 벽 허무는 반편견 교육
삶이 덧없다면, 죽어라 사느라 그렇다. 삶과 죽음을 성찰해 온전히 받아들인 노년은 피고 지는 때를 정한 꽃과 같이 생동(生動)한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에서 ‘준비된 죽음’을 알리는데 앞장서는 유은실 교수는 병원을 나와 출판사 대표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었다. 좋아하던 책을 번역하다 한글 연구가로, 크리에이터로, 교육자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 인왕산 기슭에 자리한 유 대표의 새 터전 ‘북성재’에서 그를 만나 ‘잘 사는 법’과 ‘잘 죽는 법’을 물었다.

글 윤진아 l 사진 이용기

취미가 본업이 되다

정년을 2년 남긴 지난 2021년, 유은실 서울아산병원 명예교수는 31년 병리과 교수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왔다.
“내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냈고, 대외적인 역할도 다 마무리되었으니 정년을 채울 이유가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줘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어떤 미련도 없었다. 의사이자 교수로서의 삶 외에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영국에 갔다가 들른 서점에서 미국 여의사들을 다룬 책 한 권을 우연히 읽었어요. 한국의 여의사들도 알면 좋겠다 싶어 번역을 자처했죠.”
그렇게 시작하게 된 첫 번역서 『여의사의 역사』 이후에도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우아한 노년』, 『유전자 시대의 적들』, 『천재들의 뇌를 열다』, 『진화의학의 이해』, 『생이 끝나갈 때 준비해야 할 것들』 등 전공인 병리학부터 은퇴, 죽음, 뇌과학, 인문학까지 분야도 다양하다. 그동안 자신의 삶의 방향도 함께 정립했다.
“『은퇴 없는 삶을 위한 전략』이란 책의 저자는 현업에 있을 때 현업 못지않게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 취미를 가지라고 권합니다. 그 취미가 또 다른 본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그게 저에게는 번역이었어요. 상업성이 없어 외면받는 책들을 직접 내보자는 생각에 출판사를 차렸고, 출판사를 운영하다보니 관심 있는 주제가 생겼죠. 관련된 강의를 하다 보니 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서촌에 북성재를 마련했습니다. 다음 할 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 은퇴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의사와 교수직을 그만뒀지만 굳이 은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는 거죠.”
유은실 대표는 ‘한글’과 ‘죽음’, ‘노년’을 출판사의 정체성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허원미디어에서 내놓은 『한글, 자연의 모든 소리를 담는 글자』는 한글을 사랑하는 여러 전문가가 협업한 결과물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해 출판했다. 허원미디어는 그동안 92종의 책을 출판했으며, 북성재에서 ‘허원살롱’을 통해 각종 강좌와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많은 한국인이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한글을 꼽지만, 현재의 한글 맞춤법은 한글 제자 원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요. 훈민정음 서문에는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라고 적혀 있어요. 음소나 음절이라는 언어학적 개념이 없었던 580여 년 전에 소리를 정확하게 적기 위해 하나의 소리를 초성·중성·종성 셋으로 나누고, 소리를 내는 모양과 오행의 원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외국인이나 재외 교포들이 우리 말과 글을 처음 배울 때만큼은 ‘훈민정음’에 나온 한글의 제자 원리에 따라 배운다면 더 쉽고 빨리 한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에 연수를 온 외국인 교수와 학생들에게 틈틈이 한글 제자 원리를 가르쳤는데, 짧은 시간에 자기 이름을 훌륭하게 써내더군요.”
교수직은 그만두었지만 지금도 왕성하게 ‘한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에서 한글 강연을 펼치고, 유튜브 채널을 통해 교양 콘텐츠 ‘우리가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매년 한글날 전후엔 안산강서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글 특강도 나간다. 유은실 대표의 제안으로 학생들을 위한 훈민정음해례본 교재가 마련되기도 했다. 덕분에 학생들은 재학 기간 중 최소 한 번은 해례본을 완독하며 한글의 가치를 알아볼 기회를 얻게 됐다.

죽음을 공부하고 성찰해야할 때

유은실 대표는 죽음에도 교육이 필요하며, ‘맞이하는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죽음에 대해 공론화를 유도한다. 이러한 교육은 젊을 때 할수록 효과가 큰 만큼, 관련 수업이 정규과목으로 편성되도록 일선 교사들과 지혜를 모아 나갈 계획이다.
“가장 확실한 진실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죽음은 결정적인 문제인데, 저는 죽음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현실이 의아했어요. 죽음의 과정은 힘들고 괴롭지만, 건강하면 그 힘든 과정을 짧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죽음을 깊이 생각하면 하루하루 사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특히 의사나 간호사는 꼭 살고 싶어 하는 환자들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가까이에서 보는 직업군이잖아요. 예비 의료인들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화두를 평소에 많이 접해야한다고 생각해 의대에서 공론화하고 있습니다.”
교수로 재직하던 2018년에 ‘의료인의 삶과 죽음의 이해’를 울산의대 대학원 공통 선택과목으로 개설했고, 2021년부터는 학부인 예과와 본과 과정에도 관련 과목을 운영했다. 울산대학교 교양학부와 울산과학대학교 간호학부에도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봐야 할까’라는 과목이 개설됐다. 10년에 걸쳐 틀을 짜고, 전국 의과대학 교수들과 함께 『죽음학 교실』도 저술했다.
“울산의대 대학원에서 죽음학 수업을 진행할 때, 자신이 경험한 죽음과 그것이 미친 영향에 관해 얘기해 보자는 과제를 냈어요. 어떤 학생은 레지던트 과정 중 암에 걸린 동료 의사의 주치의가 되어 친구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연구실에서 사망한 동료를 발견한 학생도 있었죠. 죽음과 관련한 경험을 나누면서 죽음을 막연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연습이 필요해요. 울산의대뿐 아니라 전국 의과대학 교육과정에 죽음학 강의를 편성하도록 노력 중입니다.”

1968년 전국공공도서관회의 및 부회 창립총회
1972년 해운대 바다도서관
미련 없는 떠남을 위해, 하루하루 열정을 다하다

황망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서둘러 마중 나가 오늘을 설칠 생각도 없다. 오늘을 제대로 산다면 죽음 또한 잘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 유은실 대표는 미련 없이 떠나기 위해서라도 하루하루를 더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건강하고 우아한 노년을 살고자 하는 분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며 내 삶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사유하니 오늘에 대한 기대가 충만해졌어요.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을 나눌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잘 살기 위해 ‘내가 오늘 죽게 된다면 아쉬운 게 뭘까’, ‘뭘 해야 할까’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면, 정말 중요하지 않은 일들은 무시할 수 있게 됩니다. 모쪼록 인생의 가을과 겨울에 접어든 분들이 그동안 쌓아온 지혜를 계속해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해 은퇴 없는 삶을 일궈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케이 로고 이미지

차별의 벽 허무는 반편견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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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과정은 힘들고 괴롭지만, 건강하면 그 힘든 마지막 과정이 짧아질 수 있습니다. 죽음을 깊이 생각하면 하루하루 사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